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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도구

── 극심한 변화와 혼돈 속에서 사회 전체가 양극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정화를 하고, 영감을 따라 왔는데 상황은 악화되어 가고, 암막의 상태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때에는 어떻게 정화를 해 나가면 될까요?

이 세계에는 조상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 구축된 견고한 마인드셋(경험과 교육, 선입견으로 만들어지는 사고의 패턴과 고정된 사고방식)이 있으며, 그것이 악화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있으면 울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마인드셋은 윤회전생을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문화의 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그 신념대로 생각하고, 문화를 만들고, 지속시키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죠. ‘왜 이렇게 되고 있을까?’라고 묻거나, 뭔가를 해결하려고 행동을 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난다’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어제 저는 이 인터뷰를 위해 정화를 하고 있었고, 파스타를 삶기 위해 뜨거운 물에 면을 넣었더니 무한∞의 모양이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서 얻은 영감은 ‘자신에게 올바른 질문을 물어보세요’였습니다. ‘자신의 귀중한 인생에 있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적합한 것일까?’라고 자기자신에게 묻는 것이야말로 필요하고, 거기에서 진정한 변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 행성에 쌓여온 마인드셋은 비유하자면 거대한 용과 같습니다.그 용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싸워온 것이죠. 하지만 그 용과 대치할 힘이 없어지면 싸움이 없어지고 생존할 이유가 없어지죠. 그렇게 되면 디비니티와 그 용과의 사이에 변혁이 일어납니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화의 혜택에 대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있는 ‘구체적인 추측’이 있으면, 그것이 방해물이 되어 신성한 존재의 힘이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결과를 맡겨야 하는 것이죠. 정화를 다 하며 ‘디비니티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라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 ‘맡긴다’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결과를 기대하며 ‘뭐가 어떻게 됐든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할 일은 다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정화하고 하고 나면 나머지는 신성한 존재에게 맡기는 것.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정화를 하고, 영감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당신의 힘을  보여주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변혁만이 변화가 아닙니다. 서서히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한국의 문화는 사람과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것에 예민해서 ‘사이를 두는 법’을 중요시하죠. 변화의 질도 그렇게 섬세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기대도, 훌륭한 아이디어도 캔버스가 제로, ‘무無’의 상태가 아니면 달성할 수 없으며, 아름다운 완벽한 그림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無’의 상태로 만들어야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셈이죠. ‘이게 맞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게 있다면 그것이 방해가 되어 영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무無여야 한다’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무無의 상태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죠.

── ‘무無여야 한다’로 모든 것을 털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의외의 변화라면 모처럼의 변화가 오고 있어도 ‘미지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거부해 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변화를 잡고 흐름을 탈 수 있을까요?

아이디어가 너무 참신하거나, 새로운 사건이 생기면 발 밑이 무너지는 듯한 변화로 느껴지고, 그것이 설령 영감으로 주어졌다 하더라도 우니히피리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위험하다고 반응해 거부해버리고 맙니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면 모처럼의 영감도 기억으로 변환되고 말죠. 특히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는 ‘안전하지 않다’는 보장에 대한 불안이 생겨나기 마련이고요. 무방비로 ‘무無’에 뛰어든다는 것은 아무런 보장도, 길도 없기 때문에 무서운 것은 당연합니다. 너무 극적인 변화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의 두려움이 따라오고, 그렇기 때문에 ‘보장받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보장은 ‘자신의 우니히피리를 돌보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보호하는’것에서 길러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용기있는 비상을 할 수 없습니다. 영감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며 두려움으로 영감을 내쫓아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입니다. (영감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가족과 연결되는 것. 조언을 해주는 코치도, 대답도 모두 자신의 내면에 있습니다.통합이 이뤄져야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 대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꼭 들어야 할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Mahayana I. Dugast, Ph.D.(마하야나 I. 두가스트) 2008년에 SITH호오포노포노와 만났다.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손자가 있다. 사업 그리고 어머니로서 할머니로서의 모든 역할에 조화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SITH호오포노포노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평화로운 마음으로 모든 방면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순간 순간의 정화에 의한 혜택이라고 한다. 마하야나 I. 두가스트의 인터뷰 기사는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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