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당신에게 있어 ‘자기자신’인가요?
아니면 어느샌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구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나요?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의 몸을 자동차나 자전거처럼 편리한 도구로써 인식하고 있습니다.
편리할 때는 신경도 쓰지 않지만 상태가 좋지 않으면 마치 완성도 낮은 낡은 차를 되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치듯 어떻게든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몸은 당신의 노예가 아닙니다.
몸은 당신이 당신의 내면에서 겪고 있는 것들을 나타내는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을 연결하는 당신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즉 적이나 노예처럼 대하는지 아니면 이번 생에서 만난 유일무이하게 신뢰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처럼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집니다.
‘몸은 당신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하는 시점에 서게 되면 정화를 할 수 있는 여러가지가 차례차례 나타날 것입니다.
이를테면 요가나 달리기, 건강 음료 혹은 식사법 같은 여러 건강법이 있는데, 몸을 하나의 아이덴티티로서 다루면 지금 그 몸에 적합한 것, 그렇지 않은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완벽한 것이 당신에게도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죠. 우리는 각자의 기억을 재생하면서 몸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정화하다 보면 당신에게 완벽한 건강이 반드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이나 부상을 입었다고해서 당신이 몸을 소중히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몸은 당신의 기억을 내려놓기 위한 모든 기회를 당신에게 줍니다.
질병이나 부상을 통해 당신이 마주하는 병원이나 의사 또는 약은 당신이 아프지 않았다고해서 마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오랜 역사 속에서 내려놓지 못했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병을 통해 당신을 적절한 장소로 데려가 주는 것이죠.
질병을 통해 만나는 사람이나 장소는 당신이 이 삶, 아니 오랜 역사 속에서 기억을 공유했던 중요한 상대이기도 합니다.
요가 스튜디오든, 병원이든, 무엇이든 당신의 몸이 당신을 데려가는 장소에는 반드시 정화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몸은 이래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상태이다’라고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신념도 정화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을 기억의 틀에서 해방시켜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포나 상처, 병 자체에도 아이덴티티가 있습니다. 각각의 목적이 있는 것이죠. 기억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짐으로써 그것들도 본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알의 씨앗이 어떻게 발아하고 얼마나 빨리 자라며 언제 열매를 맺는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정화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인생에 감사하고 있다면 당신의 노화는 당신을 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내 상태로 있을 때, 그 생명의 기쁨이 그저 당신에게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 몸은 당신이 가장 잘 돌봐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좋지 않을 때, 노화를 느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컨디션의 자동차를 구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니라 돌보고 정화해서 본래의 당신과 몸의 신성한 관계성을 되찾아가는 것입니다.
평화
넬로 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