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지금 눈 앞에 비춰지는 것,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저 ‘관찰’한 적이 있나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명상과도 같으면서, 어딘가 어려운듯 들릴 수도 있는 것이 ‘관찰’입니다.
그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바라봤던 시간이 있었나요?
‘당연히 있지’라는 답을 한 분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싶습니다.
관찰을 하고 있는 동안 어떤 생각이나 기대는 없었나요?
아주 잠깐의 순간이라도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건 순수한 관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보여지는 풍경은 벽지가 전에 비해 약간 노래졌다고 느끼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가는 동안 보이는 여러 물건들에 대해 그저 관찰을 할 수 있나요?
관찰이란 연구자가 발아한지 얼마안된 씨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처럼, 바다의 성질을 측정할 때처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저 시야로부터 뇌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꽤나 어려운 일이죠.
잠에서 깬 순간부터 어제 남긴 업무내용을 떠올리거나,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어떤 타이밍을 생각하거나… 아침이 제일 분주합니다.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더욱 더 그렇겠죠.
일어난 순간부터 아이들의 일정을 생각하고, 그 일정에 맞춰 움직이고, 차려준 아침밥상을 엎어버리고, 무엇하나 예정대로 움직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럴 때 아이들을 예정대로 움직일 수 있게 얼른 키우면 그만일까요? 아니면 부모인 우리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면 될까요?
고(故) 모르나여사는 제게 자주 ‘스스로를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아이도 아니고, 사회나 학교도 아니고, 그 순간 자신의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세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100%의 책임을 지세요. 그렇다면 아이는 완벽하게, 당신도 본래의 자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만일 고독함이나 분노,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기억해내세요. 지금까지 체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 맞닥드렸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 생각, 스트레스, 불안은 본래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 혹은 미래를 향해 대처하려고 한다면 지옥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화를 함으로써 보여지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의 불안을 정화한다는 선택을 할 때, 그 다음으로 보여지는 것이 겨울 옷을 정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금 하면 될 뿐인 것이죠.
작은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문제는 신성한 존재의 의식 속으로 되돌아갑니다.
자신을 혹은 타인을 어떻게든 하려고 한다면 그 무엇도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호오포노포노를 알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내면의 가족을 알고 있는 것에 감사하죠. 그리고 거기에서 본래의 진정한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감각이란, 비록 세계가 그 형태를 어떻게 바꾸더라도 언제든 되찾을 수 있는 힘입니다.
평화
KR